SK아이테크놀로지가 지난 5월 공모주 청약에서 80조9천억 원의 증거금을 끌어모아 역대 최고기록을 세웠다. 시장의 돈을 싹쓸이했다는 평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유·에너지업체인 SK(주)가 상장한 뒤→배터리 사업부를 쪼개서 SK이노베이션으로 ‘중복 상장’→다시 배터리 분리막 사업부를 쪼개서 SK아이테크놀로지로 ‘중중복 상장’한 것이다.
역대 두 번째로 63조6천억의 시중 돈을 쓸어 담은 곳도 SK바이오사이언스다. 쪼개기 중복상장은 똑같다. 지주회사인 SK디스커버리를 상장한 뒤→의학·백신 부문을 쪼개서 SK케미컬로 ‘중복 상장’→다시 백신사업 부문을 쪼개서 SK바이오사이언스로 ‘중중복 상장’했다.
앞으로 의약품 도매부문을 또 쪼개 SK플라즈마로 ‘중중중복 상장’을 준비 중이다. 증권업계에선 머지않아 ‘SK 화장실청소바이오와 SK주차관리테크놀로지’라는 이름으로 분리해 쪼개기 상장을 더 할 판“이라는 비아냥 섞인 얘기도 나온다.
재벌들의 쪼개기 상장 원조는 삼성과 현대그룹이다. 이들은 이재용·정의선 등 3세 승계를 위한 꼼수로 쪼개기 상장을 악용했다. 놀이공원인 삼성에버랜드와 자동차 배달업체인 현대글로비스다. 자식들 이름으로 회사를 만들어 내부거래를 통해 매출을 일으킨 뒤 상장시키고,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지배하게 한 수법이다. 상장이익을 통해 자식들이 수조 원의 돈을 챙기고 기업을 승계한 방식이다.
이런 ‘구악 재벌’기업뿐이 아니다. 최근 성공한 첨단 빅테크 기업의 ‘신흥 재벌’들 행태도 똑같다. 카카오 상장에 이어 카카오게임즈, 카카오뱅크, 카카오페이를 쪼개서 잇따라 중복 상장시켰다. 이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카카오재팬, 카카오모빌리티, 카카오암호화폐거래소 두나무도 중복 상장을 추진 중이다.
기업가치로 따지면 1개 ‘기업집단’은 한 번만 상장시켜야 한다.
미국·일본 등 선진국은 대부분 이런 원칙이 지켜진다. 구글은 알파벳이라는 이름의 지주회사 주식으로 나스닥에 상장돼 있을 뿐이다. 구글게임즈, 구글뱅크, 구글페이, 구글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의 자회사로 쪼개서 ‘중복에 중복을 거듭하는 상장’은 하지 않는다.
한 기업집단이 쪼개기 상장을 하게 되면 기존 주식이 저평가되는 가치 중복 계산으로 ‘모회사 디스카운트’가 된다. 재벌은 증권사와 손잡고 종잇조각을 발행해 시중 돈을 쓸어 담고, 개미투자자들은 거품이 잔뜩 낀 쓰레기 주식을 사는 꼴이다.
주식시장은 안정적인 산업자금 조달, 일반인의 투자수단 제공, 소득재분배를 통한 중산층 육성을 목적으로 한다. 재벌들이 시중의 돈을 쓸어 담게 하는 브로커 조직이 아니다.
국내 주식 보유 가계 비율은 52%에 달한다. 국민 가계 호주머니 돈의 절반 이상을 몇몇 재벌 기업에 돈을 대주고 있는 셈이다.
쪼개기의 모회사, 자회사 동시 상장 비율은 한국이 8.5%인데 반해 프랑스 2.2%, 독일 2.1%, 미국 0.5%다. 심지어 영국은 0%다. 우리와 비슷하게 낙후된 일본도 6.1%이지만 최근 도쿄증권거래소가 자회사를 상장 폐지하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있다. 통신회사인 NTT가 이통사 NTT도모코를 44조 원에 흡수한 뒤 상장 폐지시키기도 했다.
우리의 문제는 쪼개기 상장이 더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산 10조 원 이상 대기업 중 쪼개기 상장으로 2개 이상 상장한 업체가 208개에 달할 정도다.
왜 한국 시장에서만 이런 현상이 두드러질까?
기업 윤리 의식 부재, 주주 의식 부족, 금융감독기관의 태만이 겹쳐서 생긴 ‘자낳괴(자본시장이 낳은 괴물)’일 뿐이다. 돈벌이라면 뭐든 다하는 국내 증권사들의 편법 상장 영업도 한몫한다.
‘이씨 봉건영주’‘정씨 봉건영주’‘최씨 봉건영주’‘카카오 봉건영주’‘네이버 봉건영주’…
대한민국 경제지도에 봉건영주 같은 ‘재벌의 똬리’가 계속 생겨나는 것도 이런 음습한 환경 때문이다.
외국 기업들은 이런 땅 짚고 헤엄치기식 돈벌이를 왜 안 하는 것일까?
우리보다 높은 기업 윤리 의식 때문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주식 가치를 훼손하면 바로 소송당하는 주주들 의식 환경 때문만도 아니다. 뭐니 뭐니해도 금융감독기관의 감시 감독과 서슬 퍼런 칼날이 무서워 어떤 기업도 그런 편법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 뿐이다.
최로엡 loep@scorep.net
추석 이후 IPO 공모주 일정
<자료-금융감독원 증권신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