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중소기업에 다니는 A과장은 4년째 승진에서 ‘물’을 먹었다. 동료들이 차례로 차장으로 승진했지만 ‘만년 과장’ 신세다. 회사에선 몇 년 전 사장이 싫어하는데도 육아휴직을 쓴 뒤 ‘괘씸죄’에 걸렸다는 말이 돈다. “2년 정도 뒤처질 것은 각오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게 그의 푸념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30대 워킹맘 B씨는 첫째 아이를 돌보기 위해 1년간 육아휴직을 쓴 뒤 둘째 출산 계획을 접었다. 경력 단절과 월급 감소에도 첫째 아이 땐 어떻게든 육아휴직을 쓰고 버텼지만 둘째 때도 그렇게 할 자신이 없어서다. B씨의 남편도 “아내가 원하지 않으면 둘째를 가질 생각이 없다”고 했다.
“육아휴직도 마음대로 못 써”
육아휴직은 대표적인 출산·육아 지원 대책이다. 한국경제신문 설문조사에서도 25~45세 남녀 800명 중 91.8%가 이 제도에 대해 ‘알고 있다’고 답했다. 부모급여(66.8%), 난임 시술 지원(70.9%) 등에 비해 인지도가 훨씬 높았다.
하지만 40.4%는 ‘육아휴직 제도를 이용하기 어렵다’고 했고 5.3%는 ‘아예 제도가 없다’고 했다. ‘자유롭게 이용 가능하다’는 응답은 16.5%에 그쳤다. 이성용 한국인구학회장은 “육아휴직 등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제도는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중소기업에선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육아휴직을 사용하기 어려운 이유로는 ‘직장 동료와 상사의 눈치’(31.3%), ‘경력단절 두려움’(24.5%), ‘임금 감소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22.5%), ‘승진 누락 등 인사 고과에 부정적 영향’(21.6%)이 꼽혔다.
최슬기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육아휴직을 사용하면 부당한 불이익을 받을 뿐 아니라 승진에서 누락되는 일이 적지 않다”며 “경영진뿐 아니라 동료들의 불만이 (승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출산과 일자리 중 하나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육아휴직조차 마음대로 쓰기 어려운 현실은 설문에 응한 25~45세 남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녀 수(2명)와 실제 출산 계획(48.8%가 출산 의향 없음)에 큰 차이가 나는 핵심 요인 중 하나다.
이들은 전반적인 출산·육아 환경도 과거에 비해 나빠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부모 세대와 비교해 현재가 아이를 낳고 키우기에 좋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4.6%가 ‘좋지 않다’고 답했다. 자녀 양육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 커졌다(67.8%)는 답변이 많았다. ‘좋아졌다’는 응답은 12.6%에 그쳤다. 서울에서 남편과 맞벌이를 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40대 C씨는 “아이 맡기는 데 조선족 아주머니를 쓰면 한 달에 280만원 정도 들고, 우리나라 아주머니를 쓰면 450만원 이상 드는 게 현실”이라며 “영어 유치원이라도 보내려면 한 달에 150만~200만원은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35%가 “얼마를 줘도 안 낳겠다”
이번 조사에서도 응답자들은 아이를 키우는 데 적지 않은 돈이 든다고 답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성인이 될 때까지 필요한 자녀 양육비’는 평균 2억2334만원에 달했다.
‘정부가 출산장려금을 일시금으로 준다면 얼마가 적당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엔 ‘1000만~5000만원 미만’이 18.3%로 가장 많았다. ‘1억~2억원 미만’(11.3%), ‘5000만~1억원 미만’(9.1%)도 적지 않았다. 평균은 6348만원이었다.
하지만 34.8%는 ‘얼마를 줘도 자녀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했다. 특히 처음부터 자녀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한 응답자 중에선 66.4%가 ‘자녀 양육비를 모두 지원해주더라도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이상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현금 지원은 그 자체로는 효과가 작다는 연구가 많다”며 “현금을 주더라도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의 니즈(수요)를 채워줄 서비스가 갖춰져 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차재희 기자(jhcha@scorep.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