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민중봉기로 축출된 독재자 카다피의 둘째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49)이 차기 대통령 선거 후보로 등록했다. 카다피는 42년간 리비아를 철권통치했던 독재자였다. 사이프 알 이슬람은 민중봉기 당시 군벌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돼 석방되자 대선에 출마했다. 그는 여전히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전범으로 수배받고 있다.
내년 5월에 시행될 필리핀 대선에서는 독재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64) 전 상원의원이 출마를 선언했다. 더구나 독재자급 스트롱맨인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딸 사라도 부통령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두 사람은 함께 ‘대권 러닝메이트’로 도전한다.
리비아와 필리핀 두 나라의 시민단체들은 “독재자들의 아들딸들이 민주주의를 향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런 세습정치 현상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독재자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과 미얀마의 아웅 산 딸인 아웅 산 수치가 집권에 성공한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얼마전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 딸도 대권에 도전했다가 막판에 패배해 눈길을 끌었다.
북한, 중국, 러시아같이 세습정치를 하는 공산국가가 아닌 민주국가를 내건 나라들에서 버젓이 이런 상속, 파벌정치가 계속 이뤄지는 이유는 뭘까? 옛 왕조나 독재국가 아닌 민주시대에 아무리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선출된다 해도, 결국은 세습정치와 다를 바 없는 구조가 고착화한 건 아닐까?
세계 각국이 불공정 논란이 있는 아빠 찬스와 엄마 찬스, 금수저들의 세습정치, 신분제적인 정치적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후진국들이라 그런가? 그렇지도 않다.
미국, 일본 선진국들도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하다. 유럽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적 정치제도가 가장 발전했다는 미국에서도 부시 가문과 케네디 가문의 세습정치가 대표적이다. 신흥 트럼프 가문도 떠오르고 있다. 트럼프는 대통령 시절 중국 시진핑, 러시아 푸틴, 북한 김정은을 부러워하며 공공연하게 장기집권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의 큰딸인 이방카도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한 정치력을 키우며, 부시 가문과 케네디 가문에 이은 트럼프 가문의 세습정치를 꿈꾸고 있다.
일본은 아예 각료의 60%가 2세, 3세일 정도다. 아베, 스가, 다나카 가문 등이 대대로 세습정치를 하고 있다.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경제는 적절한 세금만 내면 상속을 인정하고 있다.
경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치 분야에서 직간접적인 세습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 세계는 왕조시대-독재시대-민주시대로 역사적 발전을 거듭했지만 직간접적인 세습정치는 그대로 남아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어느 나라나 정치 구조상 파벌, 가문, 인적 네트워크가 없이는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없기 때문으로 추정될 뿐이다. 연예인 같은 대중적 인지도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흙수저들은 정치에 입문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이상한 것은 세계 각국에서 ‘세습정치에 대한 공정성 문제’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주적 절차라는 제도적 미명으로 공정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일까? 현대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 때문일까? 세습정치라 해도 실질적인 공정성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이 없는 걸까?
21세기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 뿐이다.
최로엡 loep@scorep.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