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박의 식음료이야기] 와인3

중세 로마시대에 제조된 와인은 모두 공기가 잘 통하는 나무통에 저장되었다. 그로 인해 와인은 1~2년 안에 식초로 변하기 일쑤였고 오래될수록 낮은 가격으로 판매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로마 시대에도 유리병은 있었지만, 귀족들의 식탁에서만 사용될 만큼 귀했고 또한 깨지기 쉬워 와인병으로 사용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1400년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선 무역상인들에 의해 유리병을 잘 깨지지 않도록 짚으로 감싸 만든 키안티(Chianti)병이 만들어져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지금의 와인병과는 모양과 내구성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1600년대 영국의 제임스 1세는 유리의 제조로 인해 숲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유리를 제조할 때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고 이때부터 유리 제조업자들은 나무 대신 석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금지령은 오히려 유리 제조산업의 발전을 앞당긴 역사적인 사건이 된다. 석탄을 사용한 덕분에 더 높은 열을 낼 수 있었고 높은 열로 가열하면 유리의 성분인 규소와 탄산칼슘이 강해지고 단단해져 더 튼튼한 유리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700년대 유리병의 모양이 지금의 실린더형이 되기까지 처음엔 양파 모양으로 시작하여 망치모양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부터 코르크 마개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망치 모양 병의 입구 주변을 두툼하게 만들어 코르크 마개 사용이 용이하게 하였다.

샴페인,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와인으로 탄생

샴페인은 단순한 와인이 아니다. 프랑스 파리의 북동쪽에 위치한 쌍파뉴(Champagne)는 1600년대 유리병이 발명될 때까지 이미 와인의 생산지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와인제조업자들이 와인을 나무통 대신 유리병에 저장하면서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와인에 거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유리병에 저장해둔 와인이 병 속에서 또 한 번의 발효를 시작하여 생기게 되는 현상으로 그 원인은 기후조건에 있다. 쌍파뉴는 프랑스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스트(Yeast)가 포도원액에 들어있는 당분을 완전히 알코올로 만들기도 전에 계절이 겨울로 바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스트는 겨울잠을 자기 시작하였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남아있는 당분을 분해시키게 된다.

와인의 저장 용기로 나무통을 사용하던 과거엔 발효과정에서 만들어진 탄산가스가 나무통의 뚜껑이 열림과 동시에 전부 날아가 버렸지만 새롭게 발명된 유리병은 탄산가스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다.

동 페리뇽과 샴페인

샴페인은 한 사람에 의해서만 발명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와인이 탄생하기까지 가장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동 페리뇽(Dom Perignon)이다. 동 페리뇽은 프랑스 오빌리에(l’abbaye d’Hautvillers)수도원의 수도사로 수도원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와인 저장실에서 오랜 시간 샴페인을 연구했다.

그러나 발효 중에 생성된 탄산가스 때문에 유리병이 깨지는 일이 잦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병목에 코르크를 집어넣고 끈으로 고정시키게 된다. 이 방식은 당시의 유럽에선 새로운 시도였지만 지금처럼 높은 압력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거품은 아주 소량에 불과했다.

현대의 샴페인 제조업자들은 두 번의 발효과정을 통해 다량의 탄산가스를 얻고 있다. 1차 발효를 끝낸 와인에 당분과 이스트를 넣고 2차 발효가 될 때까지 기다린 뒤 병을 거꾸로 세워 포도 찌꺼기를 코르크 마개에 달라붙게 하고 코르크 마개를 뽑으면 찌꺼기도 함께 나오게 된다.

이때 새로운 코르크 마개를 꽂으면 거품이 가득하고 깨끗한 샴페인을 얻을 수 있게 된다.

1600년대 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사회 전반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샴페인은 탄산가스가 날아가지 못하도록 해준 유리병의 발명과 이스트가 두 번의 발효과정을 거치도록 만든 기후조건에 동 페리뇽이라는 한 수도사의 노력이 더해져 비로소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최고의 음료로 거듭날 수 있었다.

글 : 박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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